고1 · 한국사
YEON HISTORY · UNIT 02

고려의 통치 체제와 국제 질서의 변동

2022 개정 교육과정 · 성취기준 매핑 = 한국사 교과서 차례 대조 후 확정
이 단원을 마치면 — ① 광종·성종을 거치며 고려가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갖춰 간 과정을 설명할 수 있고, ② 거란·여진·송·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가 펼친 외교와 항쟁을 1차 사료로 읽어낼 수 있으며, ③ 무신정변에서 공민왕 개혁에 이르는 정치 변동과 개혁의 흐름을 인과로 꿸 수 있습니다.

🎯 왜 배울까?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을 거두어 다시 하나가 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안으로 통일했다고 끝이 아니었어요 — 밖에는 거란·여진·몽골이라는 거대한 제국들이 차례로 밀려왔습니다. 한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안으로는 권력을 어떻게 다지고, 밖으로는 강대국을 어떻게 상대하는가를 동시에 풀어야 합니다. 고려 500년은 바로 그 두 물음에 대한 긴 답이에요. 서희가 말 한마디로 영토를 얻고, 한 시대가 무신의 칼로 뒤집히고, 끝내 원의 간섭을 받다가 다시 일어서려 한 — 그 다지고 견딘 시간을 따라가 봅시다.

이 교과서의 약속. 연 역사교과서는 어느 정파에도 기울지 않습니다. 확인된 사실은 1차 사료와 학계의 정설로 적고,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여러 시각을 출처와 함께 나란히 보여 줄 뿐,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사료를 읽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는 것 — 그것이 이 책의 목표입니다.

🧭 출발 점검 — 후삼국, 기억하나요?

· 신라 말, 지방에서 일어나 후삼국 시대를 연 새로운 세력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가장 먼저 풀어야 했던 숙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신라 말 중앙 정치가 흔들리자,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호족이 일어나 저마다 세력을 키웠어요. 왕건도 그런 호족 출신이었지요. 그래서 통일 뒤 고려가 가장 먼저 풀어야 했던 숙제는 — 각지에 흩어진 강한 호족들을 어떻게 왕 아래로 묶어 중앙집권을 이루느냐였습니다. 광종과 성종의 개혁이 바로 그 답이었습니다.
고려의 따뜻한 수채 풍경
청자와 석탑, 안개 두른 산 — 개방과 문화의 고려. 그림: 힉스필드 AI 수채 생성 · 연라이프 (자유롭게 가져가 쓰셔도 좋아요 · 출처는 꼭).

1 안으로 다지다 — 고려의 통치 체제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해 다시 하나 된 나라 고려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역이자 골칫거리는 같았어요 — 호족이었지요. 태조는 혼인과 사성(賜姓)으로 호족을 끌어안되, 『정계』·『계백료서』·훈요 10조로 군주의 길을 남겼습니다. 다음 세대의 과제는 분명했습니다. 호족의 힘을 줄이고 왕권을 세우는 것. 광종노비안검법(956)으로 호족의 사병·재산 기반을 흔들고, 과거제(958)로 시험을 통해 새 인재를 뽑아 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를 길렀습니다. 이어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지방에 처음으로 12목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했습니다. 통치 기구는 2성 6부(중서문하성·상서성)를 중심으로, 고려만의 회의 기구 도병마사·식목도감이 국방과 법제를 합의로 정했어요. 지방은 5도(일반 행정)·양계(군사 지역)로 나누고, 실제 행정은 토착 향리가 맡았습니다.

왜 '과거제'가 왕권을 키웠을까

호족의 자제는 따로 시험 없이 가문의 힘으로 관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과거제시험으로 사람을 뽑지요. 합격의 길이 가문이 아니라 국왕이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있으니, 관료는 자신을 뽑아 준 왕에게 충성하게 됩니다.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한 진짜 노림수가 여기에 있었어요 — 인재 등용이자, 동시에 호족 견제 장치였던 셈입니다.

고려 정치 체제, '귀족제'인가 '관료제'인가

학계의 오랜 논쟁입니다. ① 귀족제론음서(공신·고관 자손이 시험 없이 관직 진출)와 공음전이 있었고 문벌이 권력을 세습했으니 본질은 귀족 사회다. ② 관료제론 — 그래도 핵심 요직은 과거로 채워졌고, 가문보다 능력이 중시된 면이 크다.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기보다, 고려가 귀족적 성격과 관료적 성격을 함께 지녔다고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2성 6부는 당·송을 그대로 베꼈다"?

흔한 오해입니다. 고려는 당의 3성 6부를 받아들이되 그대로 옮기지 않고 고려 실정에 맞게 변형했어요. 중서성·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으로 운영했고, 무엇보다 도병마사·식목도감이라는 고려 독자의 합의 기구를 두어 재신과 추밀이 국방·법제를 함께 정했습니다. '수용'과 '독자성'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더 깊이 — '본관제'와 향리

고려는 사람을 본관(조상의 출신지)으로 묶어 파악하고, 지방 행정의 실무는 그 지역 토착 세력인 향리에게 맡겼습니다. 중앙이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보내지 못해(지방관이 없는 속현이 더 많았음), 향리의 역할이 컸지요. '중앙집권을 지향했으나 향촌은 토착 세력이 떠받친' 고려 특유의 이중 구조입니다.

🧩 사료 탐구실 — 최승로 「시무 28조」

982년, 최승로는 성종에게 시급한 정책 28조를 올렸습니다(전해지는 건 22조). 그 안에는 고려가 나아갈 통치 방향이 담겨 있어요. 아래 구절을 눌러 보세요 — 그 조항이 드러내는 '성종의 통치 구상'이 아래에 나타납니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입니다. 바라건대 외관(外官)을 두소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소서.) 공신의 등급에 따라 자손을 등용하고, 노비의 신분을 살펴 함부로 양인이 되지 못하게 하소서.
위 밑줄 친 조항을 누르면 — 그 말이 비추는 성종 대의 통치 구상이 여기에 보입니다.
출처: 『고려사』 열전 최승로전(원문 한문) — 인용문은 연라이프 자체 번역·축약. 시무 28조 중 22조 현전.

🔑 외우기 한 수

광종·성종은 광-노과·성-시무종은 비안검·거, 종은 시무 28조·12목. 통치 기구는 2성6부+고려만의 도병마사·식목도감, 지방은 5도·양계.

✏️ 30초 떠올리기

노비안검법·과거제로 왕권을 강화한 임금은?

정답은 광종. 노비안검(956)·과거제(958)로 호족을 누르고 왕권을 세웠어요. 성종=시무 28조.

국방·법제를 재신과 추밀이 모여 정한 고려 독자의 회의 기구는?

정답은 도병마사·식목도감. 고려만의 합의 기구로, 귀족 정치의 성격을 보여 줘요.

2 밖으로 견디다 — 국제 질서의 변동

고려가 자리 잡을 무렵, 동아시아는 송·거란·여진·몽골이 차례로 패권을 다투는 다원적 국제 질서였습니다. 고려는 거란의 1차 침입(993) 때, 서희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해 한 뼘 땅도 잃지 않고 오히려 강동 6주를 얻었습니다. 거란이 다시 쳐들어오자(3차) 강감찬귀주 대첩(1019)으로 크게 물리쳤지요. 이어 여진이 강성해지자 윤관별무반을 이끌고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1107). 한편 과는 활발히 교역해, 예성강 어귀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붐볐고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Corea'라는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습니다. 13세기, 더 큰 폭풍 몽골이 닥칩니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해 맞서며 팔만대장경을 새기고, 정부가 항복한 뒤에도 삼별초가 끝까지 항쟁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원의 간섭 아래 놓이게 됩니다.
거란 격퇴 서희·강감찬 993·1019 여진 정벌 윤관·별무반·동북 9성 1107 몽골 항쟁 강화 천도·삼별초 1231~
▶ 재생을 눌러 고려의 대외 항쟁을 단계별로 따라가 보세요.

무료 연표 애니메이션 — 영상이 아니라 코드로 그려, 데이터가 가벼워요.

서희는 어떻게 싸우지 않고 땅을 얻었나

거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정복이 아니라 송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서희는 이 속내를 꿰뚫고,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며, 압록강 일대 여진이 길을 막아 거란과 교류하지 못한다"고 받아쳤어요. 그래서 거란은 군사를 물리고, 고려는 여진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상대의 의도를 읽어 낸 외교의 대표 사례입니다.

강화 천도, '항전'인가 '도피'인가

최씨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1232)를 두고 평가가 갈립니다. ① 항전론 —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을 상대로 장기 항전의 거점을 확보한, 불가피한 전략이었다. ② 비판론 — 정권은 섬에서 안전했으나 육지의 백성은 거듭된 침입에 그대로 노출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두 평가 모두 근거가 있으며, '정권의 보전'과 '백성의 고통'을 함께 보아야 균형 잡힌 판단이 됩니다.

"고려는 몽골에 완전히 흡수·식민지가 되었다"?

흔한 오해입니다. 고려는 끈질긴 항쟁 끝에 나라와 왕조를 유지한 채 강화를 맺었습니다. 직접 통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원의 간섭(부마국 체제·정동행성·공물)을 받은 것이며, 독자적 국가로 존속했어요. '간섭'과 '식민지화'는 다릅니다.

더 깊이 — 다원적 외교의 지혜

고려는 송에는 사대(事大)하되 송이 거란·금에 밀릴 때는 무리해서 군사 동맹에 끌려가지 않았고, 거란·금에는 형식상 사대해 평화를 사면서도 실리를 챙겼습니다. 한 강대국에 올인하지 않고 여러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이 외교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가 살아남는 한 방식을 보여 줍니다.

🔑 외우기 한 수

외적은 순서로 — 거란→여진→몽골. 영웅도 짝지어 — 거란서희(993·강동6주)·강감찬(1019·귀주), 여진윤관(별무반·동북9성), 몽골삼별초(끝까지 항쟁). 교류의 항구는 벽란도(Corea).

✏️ 30초 떠올리기

강동 6주를 외교 담판으로 얻어 낸 인물은?

정답은 서희(993, 거란 1차 침입). 강감찬=귀주 대첩(1019), 윤관=동북 9성(여진).

맞으면 O, 틀리면 X — "고려는 몽골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팔만대장경을 새겼다."

정답은 O.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대장경을 새겼습니다.

3 흔들리고 다시 서다 — 정치 변화와 개혁

안정기를 지나자 고려 안에서 균열이 생깁니다. 대를 이어 고위 관직을 차지한 문벌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이 잇따랐어요. 그리고 1170년, 차별받던 무신들이 칼을 들어 무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최충헌·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60여 년간 권력을 쥐었지요. 무신정권이 몽골 항쟁 끝에 무너진 뒤에는, 원의 힘에 기댄 권문세족이 새 지배층으로 떠올랐습니다. 14세기 중엽, 공민왕은 원이 쇠퇴한 틈을 타 반원 자주 개혁을 폅니다 —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고, 전민변정도감으로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노비를 바로잡았어요. 이때 성장한 신진 사대부가 훗날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여는 힘이 됩니다.
시기지배 세력주요 사건성격
문벌 사회문벌(대대로 고관)이자겸의 난(1126),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음서·공음전으로 권력 세습
무신 집권기무신(최씨 정권)무신정변(1170), 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중방·교정도감으로 통치, 하층민 봉기 빈발
원 간섭기권문세족부마국 체제, 정동행성, 대농장 확대친원 세력, 음서로 진출·불법 농장
개혁기(말기)신진 사대부공민왕 반원 개혁(전민변정도감), 성리학 수용과거로 진출, 권문세족·불교 비판

시각 A묘청은 '자주의 기상'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금국 정벌 주장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평하며, 사대에 맞선 자주적 기상의 좌절로 높이 보았다.— 자주성에 주목

시각 B묘청은 '무리한 정변'

반면 풍수도참에 기댄 비현실적 천도론이자 결국 반란으로 치달은 권력 다툼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개경 문벌과 서경 세력의 충돌로 읽는 해석.— 현실 정치에 주목

판단은 여러분의 몫. 같은 '묘청의 난'을 두고도 강조점에 따라 평가가 갈립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 근거를 들어 스스로 정해 보세요 —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근거로 생각하는 연습입니다.

🔑 외우기 한 수

지배 세력은 흐름으로 — 문벌→무신→권문세족→신진사대부. 분기점 연도 — 이자겸(1126)·묘청(1135)·무신정변(1170). 공민왕은 두 글자 자주+개혁(쌍성 수복+전민변정).

✏️ 30초 떠올리기

무신정변이 일어난 해는?

정답은 1170. 이자겸의 난(1126)·묘청의 난(1135) 뒤, 무신 차별이 쌓여 폭발했어요.

전민변정도감으로 권문세족을 누른 반원 개혁의 임금은?

정답은 공민왕. 신돈을 등용해 빼앗긴 토지·노비를 바로잡았습니다(반원 자주 개혁).
🏺 유물로 보는 고려
고려 청자 매병
고려 청자(매병) — 맑은 비취색과 연꽃 무늬가 아름다운 고려의 대표 도자기.
팔만대장경 경판
팔만대장경 경판 — 몽골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이겨 내려 새긴 목판(해인사).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 현존 세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고려 1377)·유네스코 기록유산. 위키미디어 공용 · CC0(공공도메인)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 고려 청자 매병(PD) · 팔만대장경 경판(CC BY-SA 3.0) · 직지심체요절(CC0, 위키미디어 공용). 자유롭게 가져가 쓰셔도 좋아요 · 출처는 꼭.

📌 한 장 핵심

📖 이 단원의 말 사전

노비안검법
광종이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풀어 준 법.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을 약화.
음서
공신·고관의 자손이 시험 없이 관직에 나아가던 제도. 문벌 사회를 떠받친 장치.
도병마사
재신과 추밀이 모여 국방·군사 문제를 합의한 고려 독자의 회의 기구(식목도감은 법제 담당).
강동 6주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얻은 압록강 동쪽 6개 지역. 거란 견제의 요충지.
별무반
여진 정벌을 위해 윤관이 편성한 특별 부대(신기군·신보군·항마군). 동북 9성 축조.
권문세족
원 간섭기에 친원 세력으로 권력을 잡은 지배층. 대농장을 소유하고 음서로 진출.
전민변정도감
공민왕이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전)와 노비(민)를 바로잡으려 설치한 개혁 기구.

연습문제 — 3단

교과서 핵심 사실을 바르게 짚었는지 확인합니다.

1광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시행한 정책 두 가지를 쓰시오.
정답·해설
노비안검법(956), 과거제(958). 노비안검은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을, 과거제는 인재 등용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습니다.참 검증
2거란의 1차 침입 때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은 인물과 그 연도를 쓰시오.
정답·해설
서희, 993년. 거란의 의도(송과의 단절)를 간파하고 담판하여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3무신정변이 일어난 해와, 이후 60여 년간 권력을 잡은 무신 가문을 쓰시오.
정답·해설
1170년, 최씨(최충헌·최우 등). 무신에 대한 차별과 하급 군인의 불만이 쌓여 폭발했습니다.

사료를 읽고 그 속의 통치 구상·정치 상황을 해석합니다.

1「시무 28조」의 "불교를 행함은 수신의 근본이요, 유교를 행함은 치국의 근원입니다"라는 구절에서, 최승로가 제시한 불교와 유교의 역할 구분과 그것이 성종의 통치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시오.
정답·해설
불교는 개인의 수양(수신), 유교는 나라의 운영(치국)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최승로는 불교 자체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국가 통치의 원리는 유교에 두자고 제안했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12목 설치·지방관 파견 등 제도를 정비했습니다.참 검증
2"외관(外官)을 두소서"라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나타난 지방 통치의 변화를, 그 이전 상황과 비교해 서술하시오.
정답·해설
이전에는 중앙이 지방을 직접 다스리지 못해 호족·향리에게 맡겼으나, 건의 수용 후 성종이 12목에 지방관(외관)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는 호족 통제와 중앙집권 강화의 첫걸음이었으며, 다만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보내지는 못해 속현·향리 행정은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여러 시각을 견주어 근거를 들어 자기 생각을 씁니다. 정답을 외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1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신채호는 '자주의 좌절'로 높이 평가했고, 다른 시각은 '비현실적 정변'으로 비판합니다. 두 평가를 비교하고, 당시 고려가 처한 대외 상황(금의 강성)과 국내 정치(개경 문벌 vs 서경 세력)를 근거로 자신의 해석을 서술하시오.
예시 답안·채점 관점
예시: 금에 사대를 강요당하던 상황에서 '금국 정벌·칭제건원' 주장은 자주적 열망의 표현으로 볼 여지가 있으나(신채호), 신흥 강국 금을 정벌할 현실적 국력이 없었고 풍수도참에 기댄 천도론이 결국 무력 반란으로 귀결된 점에서 무모함도 분명하다.
채점 관점: 한쪽을 택하든 절충하든, 대외 상황과 국내 정치 구도를 모두 근거로 들면 정답. 핵심은 결론이 아니라 근거의 균형과 타당성입니다.
2최씨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를 두고 '불가피한 항전'과 '백성을 외면한 도피'라는 두 평가가 갈립니다. 본문의 두 시각을 비교하고, '정권의 보전'과 '백성의 고통'을 함께 고려하여 자신의 판단을 쓰시오.
채점 관점
채점 관점: 두 시각(수전에 약한 몽골 상대 항전 거점 확보 vs 육지 백성의 피해 방치)을 모두 이해했음을 보이고, 한쪽 또는 절충안을 택한 까닭을 당시 전황·정권의 성격과 연결해 설명하면 좋은 답입니다. 단정적 비난·미화는 감점.

📝 내 말로 설명하기

"고려가 안으로 통치 체제를 다지고, 밖으로 강대국에 맞선 모습"을, 친구에게 말하듯 두세 문장으로 정리해 보세요.

예시) 고려는 안으로 광종(노비안검·과거)과 성종(시무 28조·유교)을 거쳐 2성 6부·5도 양계의 통치 체제를 다졌다. 밖으로는 서희·강감찬이 거란을, 윤관이 여진을 막았고, 몽골에는 강화 천도와 삼별초로 끝까지 맞섰다. 안정과 항쟁을 함께 해낸 점에서 '다지고 견딘 나라'였다.
오늘의 흐름 · 방사형 교류

가운데 고려, 사방으로 부딪히고 교류하다

중심에 고려를 두고 사방의 거란·여진·송·몽골과 맺은 전쟁과 교류를 한눈에. 가운데서 바깥으로 살펴보세요.

고려 거란(요) 서희 993 · 강감찬 1019 여진 윤관 별무반 벽란도 교류 (Corea) 몽골 항쟁 → 원 간섭 전쟁(붉은 선) · 교류(초록 선)

연필 크로키 '방사형 교류'(중심 고려, 사방 외세) — 단원마다 그림 모양이 달라져요. 외우지 말고 흐름을 느껴 보세요 · 연라이프 자체 제작 SVG(자유 사용·출처 표기).

🌿 단원 마무리 — 눈 감고 떠올리기

7초 동안 눈을 감고, 위 방사형 그림(가운데 고려, 사방 거란·여진·송·몽골)을 가운데서 바깥으로 그려 보세요. 떠올린 만큼이 진짜 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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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가운데 고려, 사방의 거란·여진·송·몽골
맺은 전쟁과 교류를 떠올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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